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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바람에 난초 잎은 시들고/ 어둑하니 흐트러진 구름은 하늘 가득 번져가네/ 나그네의 고단함을 모르는 이라면/ 어찌 이 강물의 차가움을 알겠는가…”
푸른 화면 위로 시구가 물결처럼 이어지고, 단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명말청초 시인 위경이 조아강을 건너며 쓴 ‘도조아강’이다. 가로 25m, 세로 60m, 높이 15m의 막힘없이 열린 거대한 공간에 검은 스피커 115대가 공중과 바닥에 줄지어 있다. 세 개의 대형 화면은 곡과 맞물려 변화하고, 노랫소리도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풍성한 중저음이 엇갈리고, 그 사이로 곧은 소리가 아스라이 뻗어 나간다. 사라진 고향과 유랑의 설움을 실은 가락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번져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물살처럼 몸을 감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열리는 ‘김영은-미래의 청취자들에게: 이동하는 소리’는 대규모 사운드 설치 작업이다. 아홉 편의 시로 만든 아홉 곡이 60분간 이어진다. 노래는 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쟁, 식민 폭력 등 아시아 역사 속 이동과 이주의 경험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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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은은 “이주는 현대의 일만이 아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전쟁과 피란, 징집과 망명 등으로 계속 이동해왔다”며 “과거의 시와 지금의 소리가 어떻게 공명할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열리는 ‘2026 ACC 미래상: 김영은-미래의 청취자들에게: 이동하는 소리’에선 115개 스피커로 공간 전체에서 소리를 감각하게 된다. 위는 김영은 작가. ACC 제공
16~17세기 수마트라섬 아체에서 활동한 함자 판수리의 ‘배의 시’는 삶을 항해에 빗대고, 허균의 ‘노객부원’은 임진왜란 뒤 유랑하는 늙은 아낙의 삶을 담았다. 시들은 낭송과 구전으로 전해졌고, 당시의 음성은 남아 있지 않다. 작가는 자료 조사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발음과 낭송 방식을 추정하고, 해당 언어권 출신으로 이주를 경험한 작곡가들과 곡을 만들었다. 과거의 시를 오늘의 소리로 다시 발화한 것이다. 그는 “과거의 소리를 지금 재해석하는 우리가 미래의 청취자일 수 있다”며 “이 소리 역시 계속 재구성되고 전승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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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몸을 감싸는 듯한 입체적 청취 경험은 가상의 음원에서 발생한 음파를 실제 공간에 재현하는 ‘파면합성’(WFS) 기술로 구현된다. 김영은은 “어디에서 들으라고 안내하지 않는다. 자리를 옮겨 들을 때마다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미술은 대개 시각 예술로 여겨지지만, 김영은은 청각을 앞세운다. 조소를 전공한 그는 학부 때부터 구조물에 스피커를 붙였다. “빈 벽을 보면 어떤 그림을 걸지보다 벽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 관심이 갔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5’ 수상자인 그는 지난 20년간 소리를 매개로 시각 중심의 역사에서 누락된 목소리와 서사를 드러내왔다. 그는 이번 전시도 “소리가 먼저고 영상이 그다음, 조명이 그다음”이었다.
같은 자리에서도 사람마다 들리는 소리는 다르다. 전시는 이주의 역사를 하나로 묶기보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각자의 몸으로 듣게 한다. 작품에 단 하나의 소리만 남긴다면 무엇이겠느냐는 물음에 김영은은 “악기 소리도 아름답고 중요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를 남기고 싶다”고 답했다. 내년 2월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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