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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갈원여병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9-23 10:5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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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제교류재단상을 수상한 한국 평화봉사단원들의 모임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의 제라드 크르직 회장(맨 왼쪽)이 송기도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FoK의 제나 깁슨 이사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평화봉사단은 1966년 처음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 올해로 60년을 맞았다. 2007년 이태식 주미대사는 당시 워싱턴 특파원들의 제안을 바탕으로 평화봉사단 재방문 사업을 추진, 이듬해 이를 실행시켰다./KF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들이 주축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FoK)가 16일 제10회 ‘한국국제교류재단(KF)상’을 받았습니다. 올해는 미국 건국 250주년이고, 한국에 평화봉사단이 처음 파견된 지 60년을 맞는 해여서 수상의 의미가 각별합니다.
KF 초청으로 방한한 평화봉사단원과 가족 30여 명이 참석한 이날 시상식에서 송기도 KF 이사장은 “한미 양국이 함께해 온 역사에서 평화봉사단이 중요한 역할을 한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이 축사를 했고,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는 영상으로 축하의 뜻을 전했습니다.
가난했던 한국에 온 미국의 젊은이들
저도 이날 시상식에 참석, 제라드 크리직 회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해온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조금 늦은 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봉사단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의 발전을 지원하고 미국을 알리기 위해 1961년 창설했습니다. 한국에는 1966년부터 1981년까지 2000명이 넘는 미국 청년들이 파견됐습니다.
이들은 흔히 영어를 가르친 ‘원어민 교사’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실제 활동은 영어 교육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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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보건·의료, 지역 사회 개발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일했습니다. 한국이 가난에서 벗어나 근대화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던 시절, 이들도 곳곳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역할을 했습니다.
1967년 한국에 파견된 평화봉사단원들이 2007년 10월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호텔에서 40주년 모임을 갖고 있다. 한국에 세 번째로 파견돼 K-3로 불린 이들은 이날 '아리랑','갑돌이와 갑순이'노래를 부르며 한국 생활을 추억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이 놀랄만큼 발전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이하원 기자
한국은 평화봉사단원들의 인생도 바꿔 놓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 외교관, 교수, 변호사, 국제 개발 전문가 등이 되어 평생 한국과 인연을 이어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2008년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한 캐슬린 스티븐스입니다. 197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충남 예산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그는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대사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유난히 큰 환영을 받은 것도 이런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 대사는 카메룬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한 후, 외교관이 돼 한국에 부임한 바 있습니다.
2007년 버지니아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
평화봉사단은 2008년부터 정부의 초청 사업으로 방한하기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저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해 10월,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공사를 지낸 리처드 크리스텐슨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서울 근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그가 평화봉사단 K-3 한국 파견 40주년 모임이 열린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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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3는 평화봉사단의 한국 파견 세 번째 기수라는 의미였습니다.
문화일보 최형두 특파원(현 국민의힘 국회의원), 한겨레 류재훈 특파원과 함께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쉐라톤 호텔로 가 보니 젊은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평화봉사단원들이 40년 전의 한국 생활을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60대가 된 50여 명이 젊은 시절의 흑백 증명사진을 목에 걸고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어서 누군가 ‘갑돌이와 갑순이’를 선창하자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따라 불렀습니다. ‘산토끼’와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도 이어졌습니다. 머리는 희끗희끗해졌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1967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20대 청년으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대부분 대학을 갓 졸업한 88명의 K-3 단원들은 서울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2년 동안 주로 영어 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원주여중에서 ‘위순자’라는 한국 이름으로 하루 6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던 캐시 위긴스는 당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부모들이 악착같이 자녀를 교육하는 것을 보고 한국이 발전할 줄 알았습니다.” 속초에서 활동했던 스티브 갤런의 말도 기억에 남습니다. “봉사를 하러 갔던 우리가 오히려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이태식 주미대사가 2007년 10월 평화봉사단 K-3 40주년 모임 후 관저로 평화봉사단 본부의 간부들을 초청 ,만찬을 함께 했다. 이 대사는 평화봉사단의 한국 활동에 감사를 표했으며 이들의 재방한 사업을 이끌었다./주미한국대사관
그날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화봉사단원 상당수가 귀국한 뒤에도 한국과의 인연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크리스텐슨은 외교관이 돼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돌아왔고, 팀 오브라이언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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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발렌타인은 해비타트 운동을 위해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6·25전쟁 연구로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도 K-3 출신입니다.
크리스텐슨은 당시 “한국에서의 봉사 활동이 나뿐 아니라 많은 동료의 삶을 바꿔 놓았다”며 “한국에서 활동한 평화봉사단원 대부분이 여전히 한국과 미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K-3 행사를 현장 취재했던 저와 최형두·류재훈 특파원은 이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뭔가 보답해야 하지 않느냐는 데 마음이 통했습니다. 특히 최형두 특파원은 문화일보 지면을 대대적으로 펼쳐서 평화봉사단을 심층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후 두 특파원과 함께 이태식 당시 주미 한국대사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목격한 평화봉사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평화봉사단원들을 다시 초청하면 어떻겠습니까. 가난했던 시절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발전한 대한민국을 직접 보여주고 감사의 뜻을 전하면 좋지 않겠습니다.” 평화봉사단원들을 단순히 ‘과거 한국에서 봉사했던 미국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의 발전 과정을 몸으로 경험했고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가진 귀중한 민간 외교 자산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움을 받았던 나라가 수십 년 뒤 그 도움을 기억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자체가 훌륭한 공공 외교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1967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 원주 여중에 파견돼 영어를 가르쳤던 캐시 위긴스씨가 미 버지니아주에서 2007년 열린 파견 40주년 모임에서 자신의 당시 신분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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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긴스씨는 당시 '위순자'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6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는데,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부모들이 악착같이 자녀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보고 한국이 발전할 줄 알았다"고 했다./이하원 기자
‘도움을 받던 나라’가 옛 봉사단원을 초청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듬해인 2008년 10월 미국 평화봉사단원 재방한 사업(Revisit Program)이 시범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시범 방문 때 61명을 시작으로 2009년 152명(56명·96명 2회 진행), 2010년 88명, 2011년 122명(41명·81명 2회 진행), 2012년 84명, 2013년 83명 등 모두 590명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약 1주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됐으며 참가자들은 과거 자신이 근무했던 학교와 보건소 등을 다시 찾아 옛 제자·동료들과 재회하고, KOICA와 교육·보건 시설 등을 방문해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한국을 다시 찾은 평화봉사단원들이 과거 자신들이 봉사 활동할 때 인연을 맺었던 한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다양한 기사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이 어려웠던 시절 우리를 도왔던 미국인들을 잊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초청해 발전상을 보여주고 감사를 표시했다는 .에서 이는 의미 있는 공공 외교 사업으로 평가됐습니다.
돌이켜보면 평화봉사단 재방문 사업에서 이태식 대사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는 많지만 이를 정책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대사는 특파원들이 전한 현장의 이야기에 외교적 가치를 부여했고, 이를 외교부 본부에 전달해 실제 사업으로 연결했습니다. 외교관의 감각과 실행력을 보여준 한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40년 만에 다시 한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평화봉사단원들과 한국의 인연은 재방한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재미 한인 사회와 특별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2009년 추석을 앞둔 9월 27일, 워싱턴 DC 인근의 북버지니아 한인회(회장 황원균) 임원들은 평화봉사단 출신들을 초청해 녹두전과 송편, 김밥 등 한국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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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초 경북대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찰스 하비는 2008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을 다녀왔는데 “한국이 놀랄 만큼 발전해서 고맙고, 우리가 보람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평화봉사단에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한국이 발전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외교관 출신의 마크 모어도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대구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그는 북버지니아 한인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다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약 40년 만에 한국인들에게 다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생들이 좀 어려졌어요. 유치원생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1970년대 전북 김제 만경읍의 4H구락부에서 활동했던 팅이 우이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마을에 슬라이드 영사기를 가져갔다가 끝내 사용하지 못했던 기억을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40년 전 한국의 가난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미국에서 한국계 어린이들에게 다시 영어를 가르치고, 재미 동포들과 둘러앉아 송편을 나눠 먹었습니다. 정부가 시작한 재방한 사업이 과거의 인연을 되살렸다면, 재미 한인 사회는 그 인연이 미국 현지에서 계속 이어지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평화봉사단이라는 ‘외교 자산’ 더 활용해야
1960~70년대 이름조차 낯설었던 한국의 지방 도시와 농촌으로 들어가 한국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했던 미국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한국을 ‘제2의 고향’처럼 여기고 한국의 발전을 자랑스러워하며 뿌듯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미 관계가 가진 특별한 자산입니다.
최근 한미 관계가 순항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참전 용사의 가족, 주한미군 출신 미국인뿐만 아니라 평화봉사단원을 적극적으로 초청, 감사하는 한국의 이미지를 알리고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공공외교가 필요해 보입니다.
oK의 제나 깁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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