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산쌍계사사적비명병서(三神山雙磎寺事蹟碑銘幷序)-일해 덕민 > 법문 및 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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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및 선시

삼신산쌍계사사적비명병서(三神山雙磎寺事蹟碑銘幷序)-일해 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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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91회 작성일 18-06-1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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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쌍계사사적비명병서

 

겸손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맑은 물결과 흘러드는 여울이 부처님의 참모습으로서 펼쳐지고、 소나무 숲과 대나무 밭이 한량없는 법신의 구름 되어 장엄을 이루나니 특별한 법문이 따로 없음이요、 또한 겨자씨와 모공 속에 청정한 불국토를 세우나니 그 누가 어느 곳에 절터를 꾸미고 다지겠는가。 그러나 자비하신 부처님의 방편을 빌리지 아니하면 괴로움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어리석은 중생을 깨달음의 법계로 이끌 수 없는지라 그런 까닭으로 급고독(給孤獨) 장자(長子)는 기타태자의 숲에다가 기원정사를 창건하였고 백장선사는 총림의 청규를 제정하여 널리 베풀었다。

돌아보건대 쌍계사는 옛 이름이 옥천사였으나 인근의 옥천사와 이름자가 겹치고 마을 어귀의 석문에 두 줄기의 계곡이 합쳐짐으로써 쌍계사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니 신라시대의 정강왕이 그 현판을 하사하였다。 앞으로는 굽이굽이 섬진강 큰 물결이 짙푸른 바다에 흘러 들어가고、 위로는 겹겹이 방장산이 드넓은 허공에 솟아오른 가운데、 아득한 시절부터 내려온 명승지들이 푸른 봉우리의 선경에 무수히 나열되어 있다。 우거진 산 빛깔은 청묵의 채색으로 물들어가고、 골짜기를 울리는 폭포소리에 청학과 백학이 노을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화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신라 천년의 옛 절이다。

산문을 연 조사는 신라 성덕왕 때 육조 스님의 정상을 이 도량의 설리갈화의 골짜기에 모신 삼법과 대비 양대 화상이요、 최초의 창건은 서기 804년부터 830년까지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진감 선사에 의해서 크고 넓게 이루어졌고、 중창은 임진란 이후에 전화(戰火)로 모두 타버린 도량을 벽암각성 선사께서 이루었는데 서기 1630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1641년까지 대웅전、 관음전、 화엄전 등을 완전하게 낙성하였다。 그 후、 중간의 보수중건은 대강백 백암성총과 대화주승 용담、경천선사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 번째 창건은 정상방광의 삼매 속에서 여년의 각고 끝에 유서 깊은 부처님 도량으로 완전히 복원한 현재의 우리 스승 고산대선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불조와의 인연이 닿은 이 도량을 상세히 더듬어 보면、 대비 화상은 신심이 돈독한 신라의 스님으로서 당에 유학하여 정진하는 가운데 육조 스님의 선법을 널리 알리는 것을 원력으로 삼았다。 삼법 화상은 속성은 김씨요、 금관 대포촌 출신이다。 총명스런 지혜와 일에 대한 담략이 있었으며、 또한 경과 율에 정통하였다。 그 당시 금마국 미륵사의 승려 규정이 당에서 귀국할 때 받들어 지니고 온 육조단경 초본을 얻어 보고 분향공경하며 독경할 때 구구절절 감득하여 깨달음이 깊던 중、 육조 스님 말씀에 '내가 입멸한 후 5-6년에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취할 것이니라'고 한 비결의 구절을 읽고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며 떠오른 영감으로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확신이 마음을 관통했다。 육신보살을 우리나라에 봉안하여 한결같이 분향하고 공양 올려 예배하고、 동방에 만대에 이르도록 청정한 복밭의 도량을 장엄하여 육조의 돈오선법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불국토를 이루리라는 서원을 부처님 앞에 세웠다。

김유신 장군의 부인으로서 출가하여 영묘사에서 수행중인 법정 비구니와 의논하여 모든 경비를 지원받고 즉시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 개원 10년 5월이었다。 보림사 육조탑 아래에서 이레 동안 야간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회향하는 밤에 광명이 탑의 꼭대기에 솟구쳐 횡으로 뻗친지라 광명의 상서로움을 우러러 예배함에 신비한 감흥을 체득하였다。 당시 힘센 장사 정만과 대비 화상이 마음을 합쳐서 한밤중 인적 없이 고요한 때에 육조 스님의 정상을 철책을 무너트리고 은밀히 가져와、 법을 펼치기 위해 몸 바친 어려움 끝에 귀국에 성공하여 법정 비구니와 함께 단상에 봉안하고 예배하며 공양을 올렸다。 그날 밤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 속에 문수 보살이 나투시어 '강주의 지리산 아래 설리갈화의 장소에 봉안하라'는 지시를 받고 지리산에 찾아드니 시절은 12월이었다。 흰 눈이 푸른 봉우리에 쌓이고 골짜기마다 험난하여 발길을 옮길 수 없는데 문득 한 쌍의 푸른 사슴이 차가운 바위 속에 나타나서 석문이 있는 골짜기로 인도하니 석문 안쪽에 몇 군데의 넓은 장소가 보였다。 눈 덮인 골짜기에 칡꽃이 질펀하게 피어 늘어져 있는지라、 그곳에 육조 스님의 정상을 받들어 탑을 세워 안에다가 안치하려 준비하는 가운데 조사가 현몽하여 말씀하시기를 '탑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비문도 기록하지 않도록 하라。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제일의 가르침이니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지도 말고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차리게 하지도 말라' 하거늘 확연하고도 밀밀한 가르침에 깊이 감복하여 돌을 깎아 함을 만들어 봉안하고 깊은 지하 암실을 만들어 비밀리에 모시어 한 자리의 난야를 이루니 이것이 이 불조도량이 열리게 된 인연설화다。이로부터 선(禪)의 꽃이 싹 틔어 향기의 바람이 동쪽으로 멀리 퍼지고、 때마침 도의와 진감 선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육조 스님을 종조로 받들어 신라 말기의 구산선문이 창건되어졌음을 선불교의 역사차원에서 알 수 있다。

  창건주 진감 선사의 불가(佛家)에서의 이름은 혜소요、 속성은 최씨니。 지금의 전주 금마 출신이다。 부친은 최창원이요。 모친은 고씨이다。 모친이 잠깐 선잠에 들었는데、 어떤 맑은 승려가 투명한 유리 항아리를 주면서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면서 한동안 울지 않는、 전생에 선근을 심은 수승하고 영험한 싹이었다。 신라 애장왕 5년 갑신년에 세공의 특사로 참예하여 당에 들어가 창주 신감 선사를 만나 뵈었더니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거늘 또 만났도다'라 하고 감탄하여 서둘러서 머리를 깎아주니 불이 마른 쑥을 태우 듯、 물줄기가 낮은 데로 흐르듯、 서로 오랜 세월의 인연을 깨달았고 대중들은 동방의 성인이라고 칭송하였다。

  당나라 헌종 원화 1년 병술에 달마조사의 면벽도량인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여러 불보살의 근원인 계의 바탕을 깨달았으며、 이어 두타행 가운데 도의 선사를 만나 조사선풍으로 선심을 더욱 깊게 하였다。 다시 장안 종남산에 도선 율사가 머무는 백천청정계 도량에 들어가 적정삼매 속에 3년 남짓 지내며 불조의 심인을 잇는 계의 핵심을 환하게 꿰뚫었으며、 장안의 사방에 통하는 길거리에서 3년 동안 짚신을 삼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바라밀보시를 원숙하게 실천하였다。

태화 4년 경술에 큰 깨달음을 얻은 상승 보살이 되어 고국에 돌아오니、 흥덕대왕이 임금의 붓을 보내 거국적으로 위로하면서 동쪽 계림의 길상지로 법석을 모시려는、 존경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상주 장백사에 머물다가 강주의 지리산 화개골짜기의 열반하신 삼법 화상의 난야 터에 육조 스님의 영당을 세워 옥천사라 하고、 선문의 강령과 종지를 활짝 열어 그 법을 청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니 도량이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육조 스님 현손으로서 본래 무일물의 선풍을 드날렸고 원통의 범음을 창작하여 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떨치니 옥천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배우려는 학인이 언제나 가득찼으며、 범패 음성으로 중생을 교화함이 지극히 컸다。

  선사께서 입적하신 후 정강왕이 고운에게 선사의 행장을 짓도록 지시를 내리고 시문을 새겨 넣도록 명하니 대선사와 대문장가가 서로 만난 자리이다。 선의 이치는 초월의 범주요 시문은 문학의 영역이니 성질의 측면에서 근본적인차이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사려가 끊어진 절대의 경지에서 절충이 이루어진다。

  고운 선생은 서기 857년 정축에 경주 사량부에서 견일의 아들로 태어났다。'12세에 베옷 입고 중국에 들어가 28세에 비단 옷 입고 고향에 돌아왔네'라 스스로 적었듯이 12살에 상선을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서기 885년 을사에 당나라 말기의 많은 학자들을 압도한 문장을 마음에 품고 귀국한다。 일 년 뒤 진감선사의 탑명을 시작으로 국보 가운데 국보인 불멸의 명저 사산비명이 전부 왕의 명령에 의하여 창작되어 전래에 없었던 한국 금석학의 근원이요 효시로 지금까지 유통되고 있으니、 설리갈화는 해동의 복전이 귀의하는 곳이요 진감과 고운은 도와 문장의 쌍절이라、 금상첨화에 산천이 더욱 빛남을 알 수 있다。

그 후 치열하고 처절한 임진년 전란으로 모두 타버린 사찰을 서기 1628년부터 1644년 사이에 덕화 화상을 화주로 벽암각성과 소요태능 화상 등이 현재의 자리에 대웅전、 관음전、 화엄전、 팔영루、 요사채 등을 건립하였으며、 서기 1695년에 백암성총 강백과 1735년(영조년)에 법훈 화상이 수시로 보수를 하였고、 1864년(고종년) 봄에 담월과 용담 양대 화상의 원력으로 목압사에 있는 탑을 옮겨 탑전을 새로 세워 육조영당이라 했고 좌우동서 방장선실을 중건하니、 이로부터 응봉영당이 더욱 빛이 났다。

  쌍계사는 지세가 떠다니는 배의 형국으로、 옛터에 자리 잡은 금당 영역과 새로 터 잡은 대웅전 영역의 두 공간으로 나뉘는 독특한 가람 구성이다。 청학루、 팔상전、 금당 영역은 승보를 위주로 육조선법에 대한 돈오와 조사에 대한 존경과 숭배가 중요시 되고、 새로 자리 잡은 일주문、 팔영루、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대웅전 영역은 불보와 법보로 귀의하는 강당체제로 구성되어 선도량과 강도량이 조화를 이루어 경학을 연구하는 학인과 본분사를 참구하는 납승의 구도의 길이 이어지고 있다。

청학루、 팔영루는 삼신산 청풍명월의 창구로써 시인묵객들의 시율 작품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 동안 세월 따라 보수 중건한 여러 건물도 쌍계사지에 모아져 있다。 또한 사찰 안에 있는 동국의 제일선원인 칠불암、 국사암、 신흥암、 불일암 등도 이번에 수집한 사적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뒷날을 기하여 남겨둘 뿐이다。

  다음 세 번째는 중창은 우리 스승이신 고산 율사에 의해 이루어졌다。우리 스승의 법명은 혜원이요、 법호는 고산이다。 부친은 해주오씨 휘는 응수요、 모친은 밀양 박씨이다。 모친이 잠깐 동안 낮잠에 들었을 때 어떤 노스님이 찾아와 영롱한 구슬 하나를 건네준 신비한 태몽을 얻어 잉태하여、 서기 1933년 계유 음력 월 9일에 경남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 428번지에서 출생하니 탄생할 때 동리 전체가 오색의 서기로 덮였으며 은하에 목욕한 맑은 별처럼 밝은 용모에 영특한 기개가 서려 넘쳤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모친을 여의어 유년시절에 슬픔과 고적함을 달랠 수 없었다。

  어느 날、 숙세에 거듭된 불교와의 인연을 깨닫고 태몽에서 구슬을 건네 준 노스님을 찾기 위하여 순진무구한 열세 살 어린 시절에 금정산 범어사를 찾아가니 산사의 모든 모습이 환히 낯익었다。 동산혜일 선사에게 의탁하여 삭발수계하고 8년 후에 비구계를 받아 지녔다。

은사에게 향한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참선 대중을 받들고자 하는 원력도 언제나 승가의 모범이었다。 화두정진 틈틈이 금어선원의 도감 소임을 맡아 대중을 외호함이 여러 철이었다。

잠시 금정산문을 나와 화두일념의 두타행으로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구법행각을 하다가 홀연 '직지인심이나 삼처전심과 같은 교외별전의 지름길도 최상승의 수행이지만 일대장경을 통달하여 경전을 가르침으로써 심법을 전하는 것이 우선적인 수행의 바른 길이다'라고 깊이 깨달았다。 본사에 돌아와 다시 선강 (善講)을 겸비하여 통달한 고봉 대강백을 찾아뵙고 탁마하는 도반 우룡 사형과 함께 선과 경의 내용을 묻기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마음의 경지를 비춰보아 삼장의 심연에 넉넉하고 두텁게 젖어 들어서 지혜의 눈이 열리고 경전에 대한 안목이 밝아져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지혜의 눈이 활짝 열렸다。 이어서 서기 1961년 신축 음력 4월 일에 황악산 직지사에서 고봉 선사로부터 우룡 화상과 함께 호를 고산으로 하여 강맥(講脈)을 전해 받고 김천 청암사、 부산 범어사에서 강석을 여니、 전국의 학인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항상 강당이 비좁았다。 그러나 경강의 정진에 게으름이 없었으며 마침내 제자인 보광과 이천 두 화상에게 전강하여 강백의 자리를 물려주고、 본래모습인 하나의 계주를 찾아 당시 석암 율사에게 귀의하여 율맥을 전해 받고、 용성-동산-석암으로 이어지는 계맥의 전승을 위해 쌍계사 금강계단을 설립하니、 중국 소림사의 달마유리계단맥과 장안 종남산 도선율사 백천청정계단맥을 이어 받아 귀국한 창건조사 진감계맥도 다시 개창했으며、 이어서 대은 금담의 칠불암에서의 기도 가운데 불조로부터 받은 상서의 계맥과 근세 만하승림의 중국 창수계맥도 우리 스승의 대(代)에 이르러 이 조사 도량에서 모두 집성되고 융합하여 종조계단으로 장엄하니、 한국불교의 선과 율의 선등과 계등의 깊은 근원이 쌍계사 금강계단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입증하였다。

  다시 반조하여 돌이켜보면、 우리 스승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포교에 원력을 세워 동래 포교당、 서울 조계사、 영천 은해사 등에서 주지 소임을 거치고 서기 1975년 5월에 쌍계사 주지로 부임하니 절이 무너지기 직전이요 도량이 황량하였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육조정상탑에 오르니 산세와 물길이 너무나 친숙하여 고향에 돌아온 기쁨을 느꼈고、 불보살 팔부신장들이 환영하여 춤을 추는 느낌이 들어 전생에 불법과 인연지인 곳임을 확인했다。

  우리 스승은 신비스런 정상의 방광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온후한 광명 속에서 어렵고도 어려운 중창불사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불조의 상서로움에 응하는 방광은 1976년 7월 일 인시에 즈음하여 정상탑에서 솟아올라 남해의 금산 보리암에까지 뻗쳐 찬란하게 빛나다가 흘러내리니 십여분간이나 계속 머물러 있음을 보았다。

  1978년 월 새벽예불을 끝낸 인시에 즈음하여 한 줄기 광명이 남해 보리암에서 솟아나와 천길만길 오르더니 이 곳 정상탑에 환하게 비치니 천지의 해와 달처럼 선명함을 우러러 보았고、 1980년 3월 일 오후 8시에 즈음하여 정상탑에서 찬연한 광명이 솟구쳐 당시 국회의원 당선 기도 중이던 신동관 양주의 전신을 비추고 섬진강으로 흘러내려가니 그 후 신 거사는 무난히 당선하여 금당의 단청으로 불조의 가피에 보답하였고、 1988년 8월 일 인시 경에는 정상탑에서 큰 불빛이 피어올라 주위의 백여 리가 정오와 같이 밝았다。 원근의 주민이 사찰의 화재로 잘못 알아 소방도구를 갖추고 왔으나 조사의 방광임을 확인하고 기쁨으로 찬탄하며 모두 불법에 귀의하였다。

 1987년 음력 7월 일 새벽에는 정상탑을 참배하고 난 뒤 좌선에 들었는데 우리의 스승 온몸에서 찬연한 광명이 번쩍번쩍 솟아올라 새벽하늘을 덮으니、 정상탑 금당과 동서방장에 비추어 방장산이 서기에 쌓이고 밝기가 태양과 같았다。

'마음의 작용은 한바탕 꿈이요 마음을 쉰 것이 곧 잠깸이로다。 꿈과 생시가 한결같은 가운데 마음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는도다'라고 깨달음이 열린 세계를 송으로 읊었다。

우리 스승은 입안에서 치아사리 3과가 출현하고 그 후에도 일 년 사이로 수차례 육신에서 오색의 사리가 나와 밤중에도 밝은 구슬처럼 빛을 발했다。 스승은 무심결에 지나쳐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렸지만 시봉하는 시자들이 놀라고 신비스러움에 감탄하였다。 청정한 지계수행 속에 계의 근본이 혈맥에 관통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 4월 1일 새벽예배 후 도량을 돌면서 평소 일과로 여년 애송하던 원각경 보안장을 암송하다가 홀연히 앞뒤가 사라지고 조사의 숨겨진 당처가 홀로 드러난지라、 기쁨에 겨워 송을 지어 가로되、

'근본 자성을 확연히 깨달으니、 수많은 부처님이 모두 눈 속의 돌이로다、 
세존의 사십구년 설법이 거북이 털이며 토끼의 뿔로서 허공에 가득하도다'라고 읊으셨다。

  이후 본사와 국사암 중창이 시작된 지 30여년 지나고서 완전한 새 절로 회향하게 되었다。이 도량에서 전계사와 조실을 겸해 30여년 머무르셨으며 옥천의 명성을 계속 이어받아 원음이 범패의 음성으로 전국의 신도를 교화하여 환희와 감탄으로 올바른 신심을 내게 하는 포교활동도 지대하셨으며、 또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장、 호계원장、 종회의원을 비롯하여 동국대학교 이사와 법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우리 스승은 사찰 창건에도 원력을 세워 부천의 석왕사、 부산의 혜원정사、 연화도의 연화사와 보덕암 등의 사찰과 암자를 설립하였고、 미래의 불자 양성을 위하여 고산장학회를 창설하여 청정한 복리를 모든 중생에게 되돌리는 보살도로 일관하였다。

  쌍계사 금당에는 서예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인 '세계일화조종육엽'과 '육조정상탑'의 현판이 고색창연하게 걸려있다。 이어서 동국제일선원 칠불암에는 다성으로 우러러 존경받는 초의 선사가 머무르면서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하였다。 선과 차의 교류 속에 추사의 '명선'과 '다반향초' 등의 유명한 붓글씨가 창작되었다。

  우리 스승은 고희의 여가에 서도를 갈고 닦아 붓글씨 솜씨가 뛰어나게 되어 글씨를 쓰면 신비스럽게 용과 구름이 나르고、 또한 노년에 시심이 파도처럼 일어나서 평소에 감득했던 선심의 세계를 선시로 창작하여 불자들에게 감동과 환희심을 주었다。 근자에는 신라 진감의 마음을 적시며 차를 마시는 방법과 김대염의 차의 싹을 전승하는 방법과 차의 성인 초의로 이어지는 다맥을 선다일미의 불심으로 오묘하게 끌어내어 후대에 널리 퍼지도록 하기 위하여 다맥전수증명법사좌에 오르셔서 승려와 일반인 차전문가 백여명에게 다맥을 전수하고 다도의범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한국선다회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30여년 완전한 중창불사의 회향과 중국 및 한국의 선교율맥과 아울러 다맥이 우리 스승 당대에 모두 집대성되어 이치와 사물이 원만하게 융화된 법계에 장엄하니 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의 공덕을 누가 알랴。

  덕민은 열네 살 어린 시절에 불도의 문에 들어서서 우리 스승을 예배하며 모신지가 여년이 흘렀다。 금년 봄 쌍계사 보살계 때에 사적과 행장을 쓰라고 가르침을 내려주시기에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물리치려 했으나 마지못하고 감당하게 되었다。

우리 스승의 선심을 더듬어 기리면서 명을 지어 올리니、

 굽이굽이 하동 포구

화개 골짜기에 찾아 드니

눈 속에 칡꽃 피어

영겁의 봄이 흐드러지네。

누가 알랴?

이 도량에

불조의 법맥이 줄기 뻗어

종조의 금당이 장엄됨을。

옥천의 넘실거리는 울림에

청학백학이 너울대고

불일폭포 저녁노을에 날리는 물거품도

고운선생의 수묵화라네。

추사의 붓 끝에

일화오엽 피어나고、

초의의 동다에

다반향초 울어나네。

아-아 동산에 밝은 해가 솟구쳐

법계를 찬란하게 비침이여。

아-아。 우리 스승이여

하늘 바람 타고 이 산중에 내려

삼십 여년 주장자를 울렸지만

본래의 모습대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았음이요、

학의 이마에 붉은 점 하나

묘하게 그려 넣었지만、

맑은 연못에 달처럼

오고간 흔적이 없으시네。

청정한 계의 구슬

영롱하고 온후함이여

아-아 얼마나

불꽃 속에 연꽃을 피웠는가。

 

오호라

우리 스승의 참다운 발자취여

청학루에 걸린 밝은 달인가、

팔영루에 스치는 맑은 바람인가。

높고도 높도다 천고의 선풍이여

탕탕도 하여라 화엄의 물결이여

삼신산은 높고 섬진강은 긴 것을。

 吐含山佛國寺學長山門人德旻漱焚香謹撰



山 中 秩

祖室 杲山慧元

會主 普光性柱

禪德 一海德旻

禪院長 碧峯曉宗

立繩 玄潭曉進

金魚 金漢烈

誦呪 振虛指玄

鐘頭 希禪

侍者 純圓  眞賢

負木 金振坤 李鍾九 權尤鉉

飯頭 高須福

菜供 柳玉春 吳敬子 李莫達

書記 裵壬煥 鄭春和 金道宣

院主 德雲

都監 玄草

護法 閒湖

布敎 曉禪

財務 淨悟

敎務 無空

總務 善雄

講師 慈應月瑚

講主 霽月通光

可書 藕潭元淨

企劃 映空妙有

諮問 影覃德雲

化主 鄭不二性 曺蓮花心 李正心明

住持 休峯尙勳

 

佛紀 二五五二年(西紀 二00八年)

戊子 陰十月 十四日

 

 

未時 樹碑 雙磎寺淸淨珍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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