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림당 월산대종사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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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12회 작성일 18-06-15 09:17본문
성림당 월산대종사 비문
달마조가 열반 후 “한쪽 신발을 주장자에 걸고 인도로 돌아가는 모습”과 육조선사의 “본래 한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 묻은 것이 있으리오” 하는 선구와 월산대종사의 “백년동안 돌아다녔지만 한걸음도 옮긴 적이 없다”는 임종 하실 때의 법문 등은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며 만고에 통하는 법칙이니 누가 입을 댈 것인가.
아- 아- 슬프다.
성림당 월산 대종사께서 불기 二五四一년 정축 음 八月 五日 八時에 불국사 염화실에서 엄연히 열반에 드시니 세속 연세 八十五요, 법납은 五十四년이다. 다비를 모시는 날에 사부대중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통곡하고 유체를 받들었으며 관민승속들의 상여 끈매는 사람들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대종사의 법명은 월산이요, 법호는 성림이시다. 부모의 성씨는 경주 최씨와 곡부 노씨이니 佛紀 二四五七년 계축 음력 五월 초일에 함경도 신흥군 원평면에서 탄생하시니 三남 二녀중 차서가 두 번째이시다. 육조스님께서 부친에게 가사 한 벌을 주시는 태몽 꿈으로 사바세계에 출현하시니 모습이 청수하며 기골이 빼어나고 기이하셨다. 유년기에는 시와 예를 배우면서 정훈교육 속에 신구학을 섭렵했으며, 장년기에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광복의 염원을 간직한 채 일본과 중국 등을 왕래하시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더욱 무상의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어느 날 여행 중에 탁발 스님이 육조단경 본래 무일물 암송하는 소리를 듣고 육조와 전생 인연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하여 안변 석왕사와 치악산 상원사를 참배하고, 불기 二四八八 갑신년에 도봉산 망월사 만일선원에 이르러 금오 대선사를 은사로 하여 득도하시니, 이는 대종사의 태몽 가사와 본래 무일물로 이어지는 출세간의 발심의 대동기이다. 이어서 덕숭산 만공선사에게 이무엇꼬의 시심마 화두를 받아 용맹정진하여 마침내는 밝은 마음의 심층에 철골이 청안함을 깨달음이 거듭거듭 이어졌으며, 격발하고 인도해주시는 선지식으로는 만공노사를 비롯하여 금봉, 고봉, 금오, 전강 등의 임제가풍의 선장들이었다. 금오노사의 보림처이던 보길도 남문사에서 철야정진 중에 선정삼매에 들어 수일간 시공을 외각으로 흘려버렸고, 청도 적천사에서 조사의 선기가 활연히 돈발하여 한물건도 없는 가운데 항상 밝고 밝아 하늘땅 생기기전 소식을 답착하시고 홀연히 일어나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여울에 떨어지는 달빛이여 나의 참마음 드러내고! 노란 국화꽃 푸른 대잎새가 진여법을 설하네! 밝고 밝은 수많은 풀잎새여 밝고 밝은 조사서래의 뜻이라네!” 하고 노래를 부르시니 이것이 육조연원에다 경허, 만공, 보월, 금오로 이어진 선가 풍을 수용한 선사의 참 면목이다. 이로부터 무애자재하시다가 뜻 맞는 도반인 청담, 향곡, 자운, 성철선사 등과 함께 문경 봉암사에서 공주청규를 만들어 구습을 혁파하고 새로운 佛敎淨化에 승풍을 떨치니 이것이 훗날 종단정화의 초석이 되었다. 一九五三년 계사에 은사이신 금오대선사를 모시고 종단정화불사에 선봉자로서 비구 종단을 확립하기위하여 일선에서 교구 본사인 속리산 법주사, 설악산 신흥사, 팔공산 동화사 주지등을 역임하였다. 一九六八년 무신 중추에 은법사인 금오대선사께서 임멸 즈음에 문도를 모아놓고 오른 손바닥을 보이시니 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홀연히 본래사를 깨달으니 불조가 어디 있으며 뱃속에 하늘땅 감추고 몸을 굴러 사자후를 토하노라. 세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쉬지도 않노라.」 라고 구경처를 보이니 금오노사께서 모든 일들을 월산에 부촉하노라 하고 인증을 내리시니 이것이 경허만공보월금오로 이어지는 불조의 법등을 이으심이다. 이후로 법주사 총지선원, 불국사, 금산사, 대승사, 불영사등 제방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三十여 성상을 납자 제접에 여가가 없으셨다. 또한 종단이 어려울 때는 사부대중의 여망에 따라 총무원장과 원로회의 의장 등의 중차대한 책임을 맡아서 종단발전에 힘을 쏟았으며, 一九七0년 경술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각 종교대표자들이 모여 창립을 한 한국종교협의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각 종교 간의 화해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一九七四년 갑인에 불국사 주지에 취임하시어 대표적인 관광사찰에 선원, 강원을 개창하여 수행도량의 본모습을 복원진작했으며 특히 평소에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위하여 육천여관의 통일대종을 주조하여 토함산정에 대종각을 건립하여 통일의 우뢰 소리를 울렸고, 이어서 법보신문을 창간하여 춘추의 올바른 필법으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크나큰 원력이었다. 이것은 대종사의 선정삼매 속에 불국토를 형성하고 선불교의 역사를 창조해가는 구경회향의 진행과정이다.
돌이켜보면 한국불교는 육조대사가 종조이지만, 육조의 제삿날이 음 八월 초三日이라는 것을 아는 고승은 드물다. 월산 조실스님께서는 그날은 항상 기억하시어 하동 쌍계사 금당 육조 정상에 향화를 올리고 추모제를 받듦이 三十여년간이었다. 향을 꽂고 난 뒤 ‘눈 속 칡꽃 속에 앉아 계신 조사를 뵈오면 가슴이 시원하고 뼈 속까지 맑고 차가워지거든 그리고 이 도량은 신자 최고운 선생의 만년배회지가 아닌가. 나의 世俗的인 조상이거든’하시는 조용히 이어지는 말씀 속에 혁혁히 타오르는 통일의 향수도 깔려 있었다. 講師들이 모시고 다과를 올리는 중에 敦煌本 육조단경이 나온 후로 본래무일물과 불성항청정 구절이 진가설이 있습니다만 하고 여쭈니, 어성을 높이시어 ‘법계의 진리는 진짜와 가짜가 추호도 없는 법. 진가를 가리는 것은 강사들이 하는 짓 아닌가. 분별을 없애게! 굳이 입을 댄다면 무일물은 벽옥을 절단하는 보검으로 선시의 격조가 매우 높고 불성항청정은 서리 눈과 같은 하얀 비단에 꽃과 새를 수놓은 선결로 한일품이니 다 조사의 진수일세.’라는 평소 달관하신 단경 말씀이 지리산을 더욱 푸르게 하고 개울물 소리도 요란해 경쾌함을 우리들은 가슴속에 간직할 수 있었다.
불기 2541년 정축 음 8월초에 미질이 깊으신지라 門道들이 임종게를 간청하니 불국선원을 종우선납에게 유촉하고나서 ,
「 回回一生 未移一步 本來其位 天地以前」
「일생을 돌고 돌고 돌았지만
한걸음도 옮긴 적 없고
본래 그 자리
하늘과 땅 생기기 전이라네」
하고 선게를 지어 손수 쓰시고 초五일 八시에 엄연 입적하시다.
대종사 적조를 더듬어 鉻을 올리니
토함산이여 산뿐이니 산이 어디인가!
잔잔한 개울물소리 피고 지는 꽃잎새 종사의 모습인 것을
소나무가지에 걸린 달 푸른 연못에 비친 달
사람과 달이 사라진 자리에 하나의 둥근 모습이네.
육조스님 법의 골수요, 고운 선생의 후손이여
태중에 가사 한벌 부모은혜 갚을까!
무일물 등에 지고 시심마 통찰하니 백천삼매 어디인가
정법안장도 버렸다네!
육조의 보검이요 경허의 선풍이요
세우지도 버리지도 쉬지도 않는 선답으로 금오의 등불을 상속했다네.
소나무 문턱에 법 자리 펴니 바윗길이 비좁고 낙낙한 원음법어 한나라가 감로수에 젖네!
눈 속에 핀 칡꽃 육조의 정상 탑이여 三 十여년 추모의 향불!
일대사법연인가 먼 고향의 향수인가!
토함산 오르내리는 지팡이 소리 統一의 범종소리
허공의 뼈도 빼앗고 골짜기 심장을 울리네!
학발에 백옥같은 자비의 모습.
태중에 가사 한 벌로 하늘땅 생기기전에 그 자리 머무시니
줄 없는 거문고 구멍 없는 피리
누가타고 누가 노래하나!
계봉산에서 가섭이 미륵불 기다리듯이 우리들의 염원이오니
영원히 계림에 오소서!
아- 아-
천추에 달은 밝은데 어느 곳에 모습 뵈올고, 일척의 큰 비석 속리산 뫼 뿌리에 솟아오르네!
佛紀 2551年 9月 15日
心喪弟子 德旻 盥潄焚香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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